마음이 머무는 방/숨어있기 좋은 방

내가 지금 여기 있는 이유..

가람비 2006. 4. 21. 03:06

 

살면서 [지금이 역사의 전환점이다]라는 생각을 두번 해 본것 같다.
 
고등학교 2학년때던가 10.26이 나고 그날 밤 12시
계엄군의 전차가 인근 대학교로 가야 할 것을 길을 잘못들어
우리학교로 들어오는 소리를 기숙사에서 들었다.
 
태어난 이래 한 사람 이름만 듣고 자라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당연히 그여야만 하는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여러 신문들이 지금까지는 자신들의 절대선이었던 것처럼 칭송해 마지않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태도를 돌변해[이제는 말할수 있다]라는 시리즈 연재물을 통해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부관참시하는 것을 보며
매일 신문을 통째로 모으기 시작했다. 스크랩이 의미 없던 때였다.
그때 처음 지금 이 시점이 우리 역사의 전환점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학교 2학년때 봄인가..
광주에선가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있었고
우리 학교에서 그에 호응하는 반미 시위가 은밀히 계획 됐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상 최초로 성조기가 불태워진 사건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맡았던 일은 참 별것 아닌 일이었다.
학생회관 2층에서 뿌리는 전단지를 받아 뭉쳐진 것을
다시 흩뿌리거나 나눠주는 일이었는데...
사이렌이 울리고 동시에 상주하던 경찰이 달려나오고...
친구들 여러명이 구속되어 며칠만에 [녹화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영장없이 군에 끌려간 그 일에서
나는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기억은 아직까지도 날 힘들게 한다...난 참 비겁한 놈이다....라고.
 
방어기제 때문이었을까? 아마 일종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원고지를 싸들고 학교 밖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넌 뭐했니? 왜 넌 지금 여기 있는거니? 하고 묻는것 같았다...
 
강한척 하며, 때로는 초월한척 하며, 세상사에 큰 관심 두지 않는척 하며
그럭저럭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가고, 취업을 하고...
대부분의 386이 그랬던 것처럼 철저하게 정치에 무관심하게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다만, 가끔 역사의 그 현장에 눈 똑바로 뜨고 내가 있었고,
내가 포함된 세대가 그래도 이 사회의 민주화에 뭔가 했다...라는 위안은 있었던것 같다.
 
정치에 대해, 사회 현상에 대해 입 꾹 다물고 관심없이 살던 어느 때,
노무현이라는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냥 그 정도로 우리 사회가 다양해 지고, 성숙됐구나...라는 정도로만 생각 했는데
덜컥 대통령에 당선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 수구 세력이 있구나..
그 뿌리가 아주 깊고, 아주 저급하구나...라는 걸...
탄핵의 소용돌이에서 서프와 [국민을협박하지말라]라는 카페는
소시민이 울분을 토해 내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수구골통들의 탄핵 쿠데타가 끝나고 서프를 탈퇴했다.
좋은 기억만을 가진건 아니었다...
총선은 내가 좋아하던 추미애의 낙선운동을 지지하며 국협말에서 치러냈다..
치러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수구 기득권층의 전횡은 없을 거라고 감히 생각 했었다.
국민의 힘이 강한걸 알았기에...
이제 어느 한 계층의 쿠데타는 국민의 강한 저항에 힘을 쓰지 못할 거다...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황우석 박사님이 세계 최초의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을 하셨다는것..
사이언스에 논문을 실었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를 가진 일인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두번째 사업에 도전할 때였다...
 
그리고 어느 날, 섀튼이 떠난다는 뉴스를 들었다.
모두 사기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티비를 본 것은 줄기세포가 없다, 내가 형이 되어주마...라고 하는 노성일이의 기자회견이었다.
작은 카페에 앉아 손님을 접대할 때였다.
 
피디수첩...한번도 보지 않았었다.
동네수첩...보지 않았었다.
다만, 느낌으로 이번이 내가 살아가면서 맞는 또 한번의 역사의 전환기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떠났던 서프를 찾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운동...
만적의 난...
동학혁명...
우리 역사 5천년에 가장 역사적인 사건들이라고 한다.
 
모두 기득권층에 대한 민초들의 항쟁이었다.
그리고
이번 줄기사태가 또 그렇다고 생각한다.
다만 정치권력이라는 제한된 범위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사회 기득권층 모두에 대한 전면적 항쟁이라는 점에서는 유일한 일일 것이다.
 
내 생애에 처음 맞이했던 우리 현대사의 변곡점에서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비겁함이 아직도 내 가슴 한 구석에서 끊임없이 나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안한다.
다만, 보다 더 중심 가까운 곳에 서 있고 싶을 뿐이다.
난 아직도 소심한 소시민이고
함께 가는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은 소시민들이다.
소시민인 그들과 함께, 좀 더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을 뿐이다.
다시는 비겁함에 부끄러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지도자 없이 치러지는 세계 최초의 시민혁명...
그 와중에 단지 한명의 증인이자 함께 한 바람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