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맹길기...
대학교 4학년 봄,
드디어 오랜 방황을 마치고
얼마 남지않은 대학생활...
나도 남들처럼 '건실'하게,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 굳게 결심하고
[아카데미 토플]을 한권 샀다.
꽤 비싸고 꽤 무거웠지만
돈값, 무게값 하느라고 뽀대는 괜찮았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토플 특강을 듣기 시작한지 며칠 지난 어느날
함께 특강을 듣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과 여자동기녀석을 데리러 그녀석 자취집엘 들렸다.
좁은 부엌이 아주 어수선하고 마당은 물바다가 되어, 무슨 수재민 수용소 같은 필이 느껴졌는데
정작 그 녀석은 근래 보기 드문, 아주 뿌듯하고 일견 자랑스러워 하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다 얻었거나, 적어도 도를 깨친듯한 표정...
나 : "야, 수도관 터졌냐? 잘하면 마당에서 미꾸라지 잡겠다"
그녀석 : ^^
나 : "말을 해 이눔아! 안하던 공부를 하더니 정신회로가 드디어 헝클어진거냐?"
그녀석 : "어..별거 아냐..걍 김치 담갔어..좀 줄테니 나중에 가져가.."
나 : ??? "너...여자....였냐? 김치도 담글줄 아냐?"
그녀석은 그 당시 깡 말라 눈과 귀와 코만 과장돼 보이던 나보다 키도 덩치도 체중도 심지어는 신발 사이즈까지도
크거나 무겁거나 해 보였고, 작거나 적거나 가볍더라도 최소한 나와 근접한 사이즈를 지닌 녀석이었다.
그 전해 겨울 어느 오지게 추운날, 수업을 마치고 함께 연적지를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녀석이 추워보이길래 "야, 추우면 이 넓은 가슴에 안겨라" 라고 전혀 맘에 없는 말을 던졌더니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 건너다보고나선 "적어도 내 가슴이 니 가슴보다는 넓고 포근하지 않겠니? 니가 안겨라" 라고 악살을 먹인적도 있는 녀석이었다.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땡땡이도 같이 치고 원고지뭉치 싸들고 함께 돌아다니면서도 그녀석이 김치를 담글거라는 건,
아니 여자들이 하는 일을 할줄 알거라는건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였다.
수재민 수용소를 정리하고 학교 가는 길에 니가 하는거 나는 못하겠냐...싶어 물었다.
나 : "김치는 어떻게 담그는거냐?"
그녀석 : "어, 그거 어려울거 없어...왼갖 잡것을 다 넣고 고추가루에 대강 버무려 통에 넣고 뚜껑 [팍]닫으면 되는거야"
나 : ─.,─ + ...그럼 그렇지..지눔이 무슨...
그 해 9월 말...
한계령 입구 장수대에 있는 한계사지를 발굴하는 후배들을 격려하러 갔다가
발굴현장 도면을 그릴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강제로 억류되어 약 한달 정도 도면을 그려준 일이 있었다.
모눈 종이에 발굴현장의 지층과 발굴되는 유물들을 그 위치와 모양, 크기 등을 실측하여 그려넣는 일이었는데
힘쓰는데 별로 쓸모가 없었던 나를 알뜰하게 부려먹으려는(?) 의도로 교수님께서 예전부터 나에게 떠 맡겼던 일이었다.
4학년이 되어 해방됐다 싶었는데, 도면을 그리던 박물관 조교선배가 개인 사정으로 발굴 현장을 비우는 바람에 내가 대타로 다시 잡힌 거였다.
억류되고 열흘 정도 지났을까?
하늘이 찢어진것처럼 비가 쏟아져 내리더니 설악산에서 원통으로 나오는 국도가 유실되어 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복구되기까지 대략 일주일 가량을 간장만으로 밥을 먹을수밖에 없었는데...
도로가 복구 되자마자 교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원통에 나가서 반찬거리와 김치를 담글 수 있는 재료를 사오라시는 거였다.
재료를 사오면서도 설마 김치 담그는 일을 내가 해야 하는 건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비 때문에 발굴 작업이 늦어진 관계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나한테 김치를 담그라는 거였다...젠장...
그때 떠오른 것이 [그녀석]의 "김치 담그는 비법"이었다..
배추를 썰어 절인 다음 눈에 띄는 왼갖것들을 넣고 고추가루와 함께 버무려 놓으니 보기에는 아주 그럴싸 했다.
작업이 끝나고 식사시간...
와! 김치다, 수고했다! 시끌시끌한 환호성도 잠시...
............................
"막걸리나 한잔 하자"
내가 난생 처음 담근 김치는 교수님의 막걸리나 한잔 하자...라는 말씀이후로
막걸리, 소주 마실때나 (억지로)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여러번의 경험으로 '온갖 잡것들' 중에 넣어야 할 것과 넣지 말아야 할 것은 대강 아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김치를 담그려고 하면 [그녀석]의 '비법'이 떠오르곤 한다.
오늘도
배추를 두포기 사다가
온갖 잡것들을 고추가루와 함께 대강 버무려 통에 넣고 뚜껑을 팍 닫았다..^^
아마도 녀석이 본다면...제법인데...할거다..ㅎ
소금 뒤집어 쓴 배추...
양념을 하기 위해 고추가루 불린 위에 이것저것 왼갖 잡것을 다 넣은 모습 ㅎ
왼갖 잡것과 배추를 버무려 놓은 모습..ㅋ
전쟁터와 전쟁에 소요된 무기(?)들
이제 뚜껑만 덮으면 된다~~~
나름 완성된 모습...
나 혼자 맛있다고 우기면 뭇 사람들은 알 도리가 없을터! ㅋㅋ
대장금 OST/오나라 ㅋㅋ
막걸리 가져와라!!! -.-